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추구집 지도 2편, 사자소학 붕우편, 지피지기, 백척간두, 소나무, 마삭줄

추구집/추구는 우리 선조들이 애송한 詩시의 글귀를 정선하여 뽑아 놓은 다섯 글자로 된 아름다운 시이다

한학 교양서로 한문을 익힘은 물론 우주 삼라만상에서부터 자연의 오묘함을 일깨워 주었다

일상생활에 스며있는 지혜오 슬기를 한 구 한 구 아름답게 꾸며 누구나 즐거운 마음으로 가볍게 애송할 수 있는

초 학서 初學書 이다, 한학을 이해하고 즐기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추구집 2편) 花有重開日 화유중개일 人無更少年인무갱소년 글쓴이 지환 함 두빈

花有重開日 人無更少年(화유 중개일 인무갱소년) 
꽃은 다시 피는 날이 있으나, 사람은 다시 젊은 날은 없으니라.

 

사자소학은 //우리가 반드시 배워서 지켜야 할 생활규범과 어른을 공경하는 법 등을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가르치는 생활철학의 글이다. 옛 선조들이 서당에서 공부할 때 처음 배우던 것으로 모든 구절이 넉자로 정리된 글로서 한문을 익힘은 물론, 어른과 부... 문화콘텐츠

사자소학 붕우편< 厭人責者 염인책자 其行無進  기행무진, 글쓴이 자환 함 두빈


염인책자  厭人責者 
남의 꾸짖음을 싫어하는 자는 
 
기행무진 其行無進
그 행동에 진전이 없다.

 

 







지피지기知彼知己 글쓴이 지환 함 두빈
지피지기知彼知己 , zhī bǐ zhī j

상대를 알고 나를 알아야 한다. 상대편과 나의 약점과 강점을 충분히 알면 상대방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말이다.
출전
「그런 까닭에 전쟁의 승리를 알 수 있는 것이 다섯 가지가 있다. 더불어 싸울 것인가와 더불어 싸우지 않을 것인가를 아는 쪽은 승리하고, 병력의 많고 적음에 따라 용병할 줄 아는 쪽은 승리하고, 위아래가 일치단결하여 함께하려고 하는 쪽은 승리하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상대의 미비함을 기다리는 쪽은 승리하고, 장수가 유능하고 군주는 간섭하지 않는 쪽이 승리한다. 이 다섯 가지는 승리를 아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상대를 알고 자신을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하지 않으며, 상대를 알지 못하고 자신을 알면 한 번 이기고 한 번 지며, 상대를 알지 못하고 자신도 알지 못하면 싸울 때마다 반드시 위태롭다고 하는 것이다.(故知勝有五. 知可以戰, 與不可以戰者勝. 識衆寡之用者勝. 上下同欲者勝. 以虞待不虞者勝. 將能而君不御者勝. 此五者, 知勝之道也. 故曰, 知彼知己, 百戰不殆. 不知彼而知己, 一勝一負. 不知彼不知己, 每戰必殆.)」(《손자(孫子) 〈모공(謀攻)〉》)

손자는 여기에서 여러 가지 승리의 방법을 이야기했는데, 전쟁에서 이기는 요체는 바로 적을 알고 나를 아는 것, 즉 ‘지피기기’라고 설명하고 있다.
용례
모든 운동 시합에서 상대방에게 이기기 위해서는 ‘지피지기’가 필수적이다. 상대방의 장점과 약점 등을 자세히 파악하여 상대방을 무너뜨릴 수 있는 방책을 세우고, 자신의 약점도 미리 파악하여 상대방의 공격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 놓아야 한다.
상대편의 사정형편을 잘 아는 동시에 자기의 사정 형편을 잘 앎/손자병법


 百尺竿頭 백척간두 글쓴이 지환 함두빈
1)백척의 높이의 장대
2)위험이나 곤란함이 그도에 달한 상태
3)누란지세(累卵之勢;족만건드려도 쓰러질 매우 위태로운 상태)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란 중국 송나라시대 도원(道源) 스님이 1004년에 저술한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과 중국 남송(南宋) 중기에 무문 혜개(無門慧開, 1183~) 스님의 저작 <무문관(無門關)> 등에 실려 있는 공안의 하나이다.
그러나 백척간두(百尺竿頭)’라는 어구 자체는 원래 중국 당나라 때의 선종 큰스님 남전 보원(南泉普願, 748~835) 선사의 제자인 장사 경잠(長沙景岑, ?~868) 선사의 게송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경잠은 어려서 출가해 남전 문하에서 수행한 뒤, 그의 법을 받았다. 경잠은 호남성 장사 녹산에서 선풍을 전개하며, 제자들을 지도했다.

하루는 장사 경잠 선사의 제자가 와서 옆 동네에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백 척이나 되는 대나무 꼭대기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습니다.”라고, 보고를 했다.
이에 장사(長沙) 선사가 진짜로 깨달은 것이 아니다. 진짜 깨달음은 한 발 더 나아가는 것이다.”라고 가르친, 중국식의 과장이 된 이야기가 배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라고 하는 공안이 됐다.
백척간두(百尺竿頭)’란 수행해서 오르고자 하는 절대 경지를 뜻한다. 최고의 경지인 백척간두에 올라 혼자만의 적정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되돌아 중생을 제도한다(進一步) 뜻이다. 중생들 삶속에서 도를 추구했듯이 장사의 공안에서 남전의 이류중행(異類中行)을 엿볼 수 있다. 선사(禪師)가 수행자나 일반 중생들에 함께 섞여 생활하면서 교화ㆍ지도하는 것을 이류중행이라 한다.

또 달리 중국 당나라시대의 유학자 오융(吳融, 850~903)의 한시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오융(吳融) <상인(商人) 출전(出典)>이라는 한시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어느 출전에서 나왔건,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주저앉은 사람이 비록 도를 깨쳤지만 참다움에 미치지 못하니 거기서 한 걸음 더 내디뎌야 시방세계 그대로 부처님의 온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극한 노력에 더해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비로소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백척(百尺)’이라는 높이의 상징성을 감안하면, (균형을 잡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높은 장대 위에 위태위태하게 올라섰다는 의미이다. 거기서 떨어지면 웬만한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그대로 떨어져 죽을 것이고, 최소한 심각한 부상을 입어 불구가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백 척(百尺)’이라는 길이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전신주와 같은 높은 꼭대기가 백척간두(百尺竿頭)이다. 그게 몇 자니,  m니 그런 걸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백 척이면 어떻고, 30m면 어떻다는 것이 아니다. 소위 상구보리(上求菩提)’라는 깨침을 구하는 향상(向上)의 도정(道程)의 절대경을 말한다. ‘고봉정상(孤峰頂上)’이고, 닦고 닦고 또 닦지 않으면 용이하게 도달하지 못하는 높은 곳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이르려도 피눈물 나는 수행을 거듭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런데 여기 주저앉아서는 아니 된다고 장사(長沙) 선사는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좌정(坐停)하는 사람’, 비록 득도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아직 진()은 아니라는 것이다.
석가나 달마도 아직 수행중(修行中)’이라고 선()에서는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학인은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다시 나아가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감[]’ 목숨 버리기[]’를 분리해 생각해서도 아니 된다. ()와 행()이 절대(絶對)가 되지 않아서는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한 걸음(一步)을 더 나아가지 못한다.
돌아오는 길을 염두에 두어서도 아니 된다.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올라 향상(向上)을 위한 노력이, 그대로 사람의 생사를 초월한, 목숨을 건 노력이 돼야만 비로소 ()’한다고 할 수 있다.
백척간두의 막다른 골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떨어져 죽을 것같이 생각되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야 더 크게 살아나게 된다는 말이다. 곧 두려움을 무릅쓰고 목숨을 걸 때에 비로소 살 길이 열린다는 의미이다. 이는 큰 깨달음의 경지는 모든 것을 내던지는 자세라야만 이룰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백 척 긴 장대 끝에서 한발 더 나아가면 추락해, 뚝 떨어져서 죽는다.
이때 필요한 것은 뭘까? 믿음이다. 믿어야 뛰어나갈 수 있다.
온전히, 온 몸으로 믿고, 완전히 맡기는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떨어지면 자아는 죽고 우주가 깨어난다.
, 절대 절명의 순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과감하게 앞으로 나아가려는 결심을 말하며, 노력하는 위에 더 한층 노력하면 소망하는바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100척이나 되는 높은 장대 위에 간신히 서 있는 사람에게 한 발 더 나아가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목적이나 경지(境地), 깨달음에 도달했어도 거기서 멈추지 말고, 이미 노력한 그 위에 죽음을 각오하고 더욱 노력하라, 두려움을 무릅쓰고 목숨을 걸 때에 비로소 살 길이 열린다는 뜻이다.
불가(佛家)의 용어지만, 유학자들도 학문을 발전시키기 위한 결단력의 중요성을 설하기 위해 이 한자성어를 애용하곤 했다. “잘하고 있지만 더 잘하자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리하여 여러 사례에서 이 말을 사용하고 있다.


• 사례 1 ; 구산(九山秀蓮, 1909~1983) 스님의 초심자(初心者)에게 하는 당부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 육단심(肉團心)이 동()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는 마음인 육단심이 동하면 상기병(上氣病)이 나기 쉬우니 상기가 되지 않도록 기식(氣息)을 잘 조절해야 한다. 「입지여산立志如山) 하고 안심사해(安心似海)」라, 그 뜻은 태산과 같이 굳게 세우고도 마음은 바다와 같이 안정(安靜)해야 한다.
순경(順境)과 역경(逆境)에 움직이지 아니하고 천 가지 만 가지의 의심을 오직 "이 뭣고"라는 화두(話頭)에 집중시켜 되돌려야 한다. 이렇게 하여 공부가 점차 깊어지면 정식(情識)이 자연히 희박해진다. 정감(情感)은 망상이요 화두는 진성(眞性)이기 때문에 화두가 순일(純一)해지면 망상이 자연히 사라진다.
이 경지에 이르면 여롱여치(如聾如痴), 귀머거리와 같고 바보 같아서 봐도 보는 것이 아니요 들어도 듣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경계가 오면 기뻐하지도 말고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밥을 먹을 때나 옷을 입을 때나 오직 화두(話頭)만을 일념(一念)으로 참구해야 한다. 깨달음을 얻기란 광석(鑛石)을 제련(製鍊)하여 순금을 잡아내는 것처럼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약간의 두통이 생겨도 참고 육체적으로 피로나 고통이 와도 참고 견디어야 한다. 화두를 잡을 때에는 흐르는 물에 배를 거슬러 밀고 올라가듯 전력을 다해야 한다.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이럴 때, 주춤하지 말고, 죽을힘을 다해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위에 더 노력해야 한다.
망상만 심하게 끓어오를 때에는 자리에서 일어나 포행(布行)하라. 그러면 망상이 저절로 가라앉고 화두가 다시 성성(惺惺)해진다. 이때에 화두가 흩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어느 때는 얼음 위에서 배를 밀듯 술술 나가고, 어느 때는 우물 안에 소를 몰아넣는 것처럼 화두를 잡으면 다시 빠져 나가고 또 잡아도 자꾸만 빠져 나간다.
이렇듯 어려울 때도 그저 끊임없이 화두를 잡고 나가면서 죽을 판 살판 애써 정진(精進)하게 되면 화두는 점점 익어진다. 익은 망상은 설어지고 설었던 공부는 익어져서 화두가 서서히 수중(手中)에 들어오게 된다. 선근(善根)이 익어지고 어느덧 시절인연(時節因緣)이 오면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고우 스님
• 사례 2 ; 고우 스님(隱庵古愚, 1937~2021)의 깨침


부처님오신 날에도 등을 켜지 않고, 법당에서는 재()와 불공 없이 오직 법문과 참선 수련만 하는 절이 있다. 경북 봉화 문수산에 있는 금봉암이다. 기복보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되새기는 청복(淸福)을 닦자는 고우(古愚) 스님의 수행가풍이다.
고우 스님은 소박하고 지성을 갖춘 이 시대의 마지막 선승이었다. 학식이 뛰어나진 않으나 체득한 혜안으로 막힘이 없이 불법의 근본 자리를 현대인들에게 쉽게 설했다. 회통의 원리를 그대로 보여주신 분이다.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의 인간형은 자유인이다. 달리 말하면,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깨달음에 이르러야 한다. 그런데 고우 스님은 설사 깨닫지 못한다 해도 이치를 아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했다.
그 이치란 존재의 원리, 본질을 볼 수 있는 시선이다. 스님은 그것을 중도의 연기로 칭했다.
고우 스님의 가르침은 중도, 연기, 정견 세 단어로 압축된다.
스님은 중도(中道)란 불교의 근본 자리다. 정견(正見)은 중도와 거기에서 파생되는 연기를 바로 보는 것으로, 일상에서 시각을 변화시켜 중생의 자리에서 본래 부처임을 보게 한다.”고 설했다.
깨달음은 본질을 보는 것이다. 차별 현상으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그것을 아우른 공통된 본질이 있다. 스님은 중도가 바로 존재의 본질이라고 했다. 중도의 자리를 보기 위해서는 연기법을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새끼, 짚신, 가마니를 예시로 든 스님은 이것들은 그 형태와 쓰임새가 모두 다르나 재료는 짚으로, 그 본질은 하나다. 이를 알아채는 게 바로 불교의 공부이자 견성이라 했다.
스님은 중도가 곧 연기라 한다. “중생들은 차별 경계에 집착해 분별하지만, 여래는 양변을 여읜 중도의 자리에서 모든 존재는 서로 의지해 생겨나는 연기 원리를 설한다. 연기법은 곧 존재의 원리이며, 이 세상은 연기로 존재한다는 것이 불교의 답이다.”
고우 스님의 이러한 견처에 정점을 찍은 계기는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라는 문구였다. 그동안 나름대로의 도리를 깨달았다고 생각했던 스님은, 이 문구에서 의혹이 들어 다시 참구하게 됐다.
이 도리에 대한 가장 명확한 설명이 성철 스님의 <백일법문>에 있었는데, 다른 논서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깊은 혜안이 담겨 있었다.
스님은 “‘백척간두진일보라는 말을 온전히 이해하고 안목이 열렸다고나 할까. 모든 존재 원리가 이해되었다. 이건 화두 타파하고는 다른 건데, 당시에는 회광반조 공부를 하고 있었다.” 고우 스님의 술회였다.
그리고 고우 스님은 그래서 어떻게 됐다거나,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결말을 말씀하셔야 후학들이 배움을 받을 텐데, 그런 말을 남기지도 않고 그만 적멸에 드셔서(2021) 밑 없는 글로 마감할 수밖에 없다.


• 사례 3 ; 원오(圓悟克勤, 1063~1135) 선사의 수시(垂示)


중국 송대의 원오(圓悟克勤) 선사는 <벽암록>에서 다음과 같이 수시(垂示)했다.
절대 진리란 아무리 뛰어난 성인이라 해도 말이나 글로 전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면서 제멋대로 이게 부처이고, 이게 진여이고, 이게 절대라고 떠들어댄다. 이것은 공연한 헛수고이다. 마치 달그림자를 잡으려다 물에 빠져죽은 원숭이 꼴이다. 향상일로(向上一路)의 당처는 말이나 글로 전할 수가 없는 법이다. 무엇 때문에 우리 주위에는 번잡한 공안(公案) 따위가 그리도 많은가. 스스로 참구하라.”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이러 할 때 사생결단으로 한 걸을 더 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사량분별로 실상을 탐구하려는 자세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진리는 아무리 훌륭한 성인이라도 말이나 글로는 전할 수 없다. 사량분별로 얻어지는 지혜는 지혜가 아니라 관념의 유희에 불과하다. 궁극은 백척간두(百尺竿頭) 저 앞에 있다.


• 사례 4 ; 전후제단(前後際斷)의 의미


『선()에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면 눈으로 무엇을 봐도 보는 것에 꺼들리지 않고, 귀로 무슨 소리를 들어도 거기에 꺼들리지 않는다. 눈이 떠있고 귀가 열려 있으니, 뭘 보면 눈에 보이고, 귀가 열려있으니 무슨 소리가 들리지만, 그냥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 거기에 꺼들리지 않으면, 그 보이는 것이나 들리는 소리는 나에게 아무런 영향이나 자극을 주지 아니하고 그냥 바람처럼 스쳐 가버리니까, 그까짓 것 상관이 없다. 그래서 전후가 끊어져, ― 전후제단(前後際斷)해서 밥을 먹어도 한 알도 씹은 바가 없고 종일 걸어도 한 뼘 땅도 밟음이 없어야 한다고 고인(古人)은 말했다.
그래서 선가에서 화두가 성성하다고 말하는 것은 과거도 미래도 다 끊어져 현전일념(現前一念)이라, 현재심만 온전하다는 뜻이다. 산을 봐도, 물을 봐도, 산이나 물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밥을 먹어도 맛을 모르는,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현전일념이라, 성성적적(惺惺寂寂) 하게 단속해나감으로써 전후가 끊어져서, 본참 공안(本參公安)을 타파함으로써만 이 무공적(無孔笛)을 잡을 수가 있고 그 무공적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송담 스님
전후제단(前後際斷)’이란 앞과 뒤를 잘라낸다는 말이다. <유마경(維摩經)>, <벽암록(碧巖錄)> 등 많은 경론에서 회자되는 말인데, 앞의 시간과 뒤의 시간이 끊어진 상태를 말한다. 과거의 일을 후회하지 말고, 미래의 일을 미리 걱정하지 말며, 후회가 남지 않도록 하루하루에 전력을 다하라는 뜻이다. 내일로 미루지 말고 백두대간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하라는 것이다. 전후제단(前後際斷)은 인간의 행위가 목표를 향한 과정이란 말인가? 아니면, 과정의 순간순간이 중요하다는 말인가? 이럴 때 한 순간 한 행위는 절대성을 띠게 된다. 그만큼 순간순간이 중요하니 현전일념(現前一念) 하라는 것이다.


• 사례 5 ; ‘해탈(解脫)’이라는 보상


아무리 해탈을 했다고 해도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현실의 영향을 받는다. 영하의 날씨에 가면 춥고, 남이 때리면 아프고, 때가 되면 배가 고파 먹어야 한다. 부처님께서도 병으로 많은 고생을 하셨고, 결국엔 음식을 잘못 드시고 배탈이 나서 급기야 반열반에 드신 것이다.
몸을 가진 자는 아무리 깨달아도 몸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어야 한다. 안 그러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에서 벗어나면 업()이 없기 때문에 아무 것도 남지 않고 다시 맑아진다. 그래서 해탈한 자는 더 이상 업에 얼룩지지 않는다.
우주의 열매인 해탈은 이 우주에서 가장 큰 공덕을 지은 자만이 가능하다. 진리의 인연을 만나 끝없는 깨우침과 공덕으로 우주에서 최고 선근을 얻어야 한다. 그리하여 세상이 움직일 수 없는 양심과 하늘도 꺾을 수 없는 용기가 있어 어두운 세상에 지지 않아야 오탁악세(五濁惡世)의 어둠을 뚫고 해탈의 열매를 맺게 된다.
어둡고 거친 세상과 겨루어 결코 지지 않는 의지와 용기가 있어 세상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모두 불사를 수 있을 때 비로소 해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뜨거운 보상이다.


• 사례 6 ; 구경위(究竟位)에 이르기


<청정도론>에서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는 과정을 설명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수행자는 사마타선()으로 제1선정에서 제7선정까지 차례로 올라간다. 매 단계마다 선정에 들어서 현묘하고 고요한 상태에서 「무상ㆍ고ㆍ무아」 삼법인(三法印)을 관조한다. 이렇게 해서 제7선정까지 들어간다. 이제 제7선정에서 나온 후 얼마동안 멸진정에 머물 것인가를 미리 마음으로 시간을 결정한다.
그런 다음 제8선정에 든 후 바로 멸진정으로 나아간다. 이 상태에서 7일까지 갈 수 있다고 한다. 이때 의식과 신체의 기능이 정지돼 마치 죽은 사람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멸진정이란 마음작용이 완전히 끊긴 삼매를 말한다. 번뇌의 찌꺼기를 다 녹여버린 것이다.
비상비비상처선(非想非非想處禪)까지는 아직 번뇌의 찌꺼기가 조금 남아 있지만 멸진정에 이르면, 번뇌가 녹아서 이생위(離生位), 너와 나의 차이, 또는 사물과 나와의 차이가 전혀 없이 일체존재 모두가 다 하나의 불성(佛性)으로 해서 완전히 통일이 되는 경계에 이른다. 그리고 그 다음은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이렇게 돼야 비로소 구경위(究竟位)이다.
그때는 금생에 지은 번뇌 또는 과거 전생으로부터 잠재의식에 묻어온 번뇌를 다 뿌리 뽑아서 참 우주의 본바탕인 불성과 하나로 일치된다. 이것이 바로 멸진정이라고 하는데, 마지막 아홉 단계이다.


• 사례 7 ;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집념

측천무후(則天武后)는 당나라 고종(高宗)의 황후로, 중국에서 여성으로 유일하게 황제가 되었던 인물이다. 그녀는 당 태종(太宗)의 후궁으로 입궁했다가 태종의 아들인 고종의 황후를 모살하고 그 자신이 황후가 됐다.
고종이 죽자 국호를 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가 돼 15년 동안 중국을 통치했다. 죽을 때쯤에는 다시 나라를 이씨(李氏)에게 돌려준 후 고종의 황후로 되돌아가 장례를 치르게 하면서, 사후 자신에 대한 폄훼를 우려해 무자비(無字碑)를 세우게 하는 등 용의주도함마저 보였다.
측천무후는 뛰어난 외모와 강한 권력욕, 그리고 타고난 야심과 지모로 권력의 생리와 인간의 심리를 체득한 후 갖은 수단을 동원해, 심지어 친자(親子)를 죽이면서까지 해서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정을 장악하고 반대파를 철저히 통제하는 공포정치를 폈지만, 재능이 출중한 인재들은 신분을 따지지 않고 등용해 상대적으로 민생은 안정돼 지금에 와서는 역사적 재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그녀가 14살의 평범한 소녀에서 황실의 후궁으로 들어가 황후의 지위로 오르고, 나아가서 황제가 될 때까지 그의 뇌리에 박혀있던 단 한마디는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였다. 그 결과 중국 반만년 역사에서 유일한 여황제가 됐던 것이다.


• 사례 8 ; 일본 고이라는 물고기 신화


일본에 하늘로 날아간 고이라는 물고기의 신화가 있다. 한 조그만 잉어과인 이 물고기가 불가능한 도전을 시도하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강물을 거슬러 헤엄쳐 이 강물의 원천(源泉)까지 가보는 힘겨운 도전이었다.
고이는 매순간 집중하고 몰입해야만 했다. 거센 물결을 헤치며 사투를 계속한다. 한눈을 팔다간 자신도 모르게 한참 떠내려가 바다 입구까지 밀려가야 한다.
고이는 뾰족한 돌에 부딪혀 피가 나고 다른 포식어류들의 공격에 노출되지만, 이 강물의 원천을 향해 외로운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강물에 몸을 실어 내려가는 다른 물고기들은 고이를 이해할 수 없다. 그냥 시류에 어울려 살지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극복할 수 없는 강물을 대적한다는 말인가! ‘고이는 이런 말들을 들으면 못 들은 체하지만, 사실은 힘겨워 금방이라도 다른 물고기들처럼 강물에 몸을 맡기고 싶었다.
그러나 고이는 기를 쓰고 전진했다. 상류로 올라갈수록 물살은 더욱 거세지고 고이의 체력이 고갈되고 있을 때, ‘고이를 철저하게 좌절시킬 만한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폭포수가 앞을 가로막는다.
여기에서 고이는 불가능한 창의력을 끌어낸다. “내가 비록 물고기이지만, 물고기이기를 포기하겠다. 마치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는 것처럼 지느러미와 꼬리를 날개로 만들어 단숨에 폭포 위로 날아가면 되지 않는가!”
고이의 자기 믿음이 그 순간에 그를 한 마리 용()으로 변용시켜버린다. ‘고이의 신념이 기적을 이루어낸 것이다.
그러자 고이는 자신을 가차 없이 떠내려버리는 강물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용이 되어 하늘을 훨훨 날아오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발밑에 아련하게 사라지는 폭포수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시방세계현전신(十方世界現全身)이라」
목숨을 무릅쓰고 백척 장대 끝에서 한발 더 나아가라는 말이다. 그러면 모든 시⋅공간을 초월한 세계를 보게 될 것이다. 우주의 과거, 현재, 미래의 시⋅공간을 뛰어넘어 또 다른 세계를 만날 것이다. 곧 크게 깨달을 것이라는 말이다.
시⋅공간의 제약을 받던 나는 언제나 제한된 속에서 나를 주장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나의 경험과 나의 식견에 매여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아갈 것이다.
당신은 시류에 떠내려가는 맥없는 피라미로 살 것인가? 아니면 신념으로 뭉쳐진 성공신화의 용으로 거듭날 것인가?”
지혜 있는 사람은 죽음을 마주하게 되면, 참된 삶이 무엇인지 스스로 잡문 자답한다. 그리고 남겨진 시간이 얼마이든 최선을 다해 참된 의미의 삶을 살고자 백척간두진일보 할 것이다.


• 사례 9 ;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충고


조선 후기 거상으로 유명했던 임상옥(林尙沃)이 인삼을 바리바리 싣고 중국에 갔을 때, 그가 팔려고 가져간 조선인삼을 헐값에 사려고 중국 상인들이 담합을 해서 불매동맹을 맺어 구입하지 않고 간만보고 있는 상황이 초래됐다. 자칫 빈털터리가 될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난처해진 임상옥이 때마침 북경에 함께 갔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하면 좋을지 의견을 물었다.
지금 어떤 사람이 백척간두에 올라서 있다. 오도가도 할 수 없어 죽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내려올 수 있겠나?” 그러자 추사는 내려올 수 없다고 답했다. 당혹스러워하는 임상옥에게 추사는 붓으로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라는 일곱 자를 써서 주었다.
여기에 큰 깨달음을 얻은 임상옥은 중국 상인들이 보는 앞에서 인삼을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이에 기겁을 한 중국 상인들이 임상옥에 머리 숙여 사죄해, 결국 모주 제값을 받고 팔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람이 궁극에 처했을 때, 이것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기 쉬우나 사람은 마음먹기에 따라 목숨을 내놓고, 극한을 향해 치달을 때,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그 경지에 이르면 모두가 머리 숙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극한의 경지에 오를 수 있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야말로 발군의 용기와 지혜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겨우 남은 거북선 12척으로 10만 왜 수군을 물리쳤던 것도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의 정신으로 목숨을 걸고 진두지휘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이등박문(伊藤博文)을 하얼빈 역에서 사살한 것이야말로 생사를 초월한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의 백미라 할 수 있다. 그랬기에 이등박문을 이길 수 있었고, 안중근 의사는 영원히 우리들 가슴에 살아있는 것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들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작성자 아미산







             

             08년 폐가에서 물통에서 물한모금 얻어먹지 못해도 잘자라고 있네요 주인잘못만나서 고생

             0

제주 고향집 관리부족으로  마삭줄 소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