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사자소학,불립문자,주화작청,조삼모사,서산대사 선시/ 김구 선생, 제주향나무

사자소학  상세하게 가르치는 생활철학의 글이다. 옛 선조들이 서당에서 공부할 때 처음 배우던 것으로 모든 구절이 넉자로 정리된 글로서 한문을 익힘은 물론, 어른과 부... 문화콘텐츠

사자소학 사제편 //  能知能行능지능행   總是師功 총시사공  글쓴이 지환 함 두빈

能知能行능지능행 은  알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것은

總是師功 총시사공은  모두 스승의 공이니라,

 

                                 불립문자  不立文字 : 글쓴이  지환 함두빈 

도를 깨닫는 것은 문자나 말로써 전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것임.

불립문자는 선의 종지를 표현하는 어구인 '불립문자(不立文字)·교외별전(敎外別傳)·직지인심(直指人心)·견성성불(見性成佛)' 가운데 일구로서 일반적으로 교외별전의 일구와 함께 언급된다. 문자를 내세우지 않는다는 말은 언설과 문자를 활용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언설과 문자가 지니고 있는 형식과 틀에 집착하거나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뜻이다. 문자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자재하게 활용하는 선의 입장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선종에서는 교학에서 경론의 문자와 교설만을 주된 것으로 삼아서 연구하고 강조하는 것은 불교의 진정한 정신을 상실하는 것이라고 간주한다. 그리하여 진정한 정법은 단순한 문자와 경교에 의거하지 않고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승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체험을 중시하여 불립문자 교외별전의 종지를 주장한다,

 

 

주화 작청  야화 서청  晝話 雀聽 夜話 鼠聽 글쓴이 지환 함 두빈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말조심하여 함부로 말하지 말라)/속담

"주화작청(晝話雀聽)이요, 야화서청(夜話鼠聽)이라" 했던가. 
 '낮말은 참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말이다. 
 새삼 통신비밀, 전기통신기술을 따지고자 함은 아니다. 
 땅굴이나 땅속에 묻은 항아리에 숨어서 엿듣는 행위를 절청(竊聽)이라 했는데, 
 도청(盜聽)인 것이다. 
 - 그림을 빨리 그리는 특무를 활용한 명나라 주원장,  
  적진에 잠입해서 천장과 벽이 돼 염탐한 일본 전국시대 닌자, 
 - 조선 시대에는 '규비(糾婢)'라는 직책의 하인을 둬서 유력 인사의 주변을 엿듣고 보고하게 하는 등 
시대별로 수법은 다르지만, 나름 조직 차원의 도청이 일반화돼 있었다. 
 이처럼 전쟁과 경쟁에서 우위를 도청에서 찾고자 한 노력은 역사의 어느 순간에서건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조삼모사 朝三暮四  / 작자 장주(중국 전국 시대 철학자)        글쓴이 지환 함두빈 

간교스러운 꾀로 남을 희롱하여 속이는 일.

저공이 도토리를 주면서 말하기를 아침에 세 개를 주고 저녁에 네개를 주겠다, 하니

뭇 원숭이들이 모두 일어나 화를 내더라, 조금 있다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아침에

네 개를 주고 저녁에 세개를 주겠다, 하니 뭇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하더라.

교묘한 말솜씨로 상대를 우롱하여 적당히 넘기는 寓意(우의) 적인 이야기저공이 도토리를 주면서 말하기를 아침에 세 개를 주고 저녁에 네개를 주겠다, 하니

뭇 원숭이들이 모두 일어나 화를 내더라, 조금 있다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아침에

네 개를 주고 저녁에 세개를 주겠다, 하니 뭇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하더라.

교묘한 말솜씨로 상대를 우롱하여 적당히 넘기는 寓意(우의) 적인 이야기/고사성어

ㅇㅇ백범 김구선생  글을 쓰다  ㅇㅇ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눈을 밟고 들 가운데를 가는데

不須胡亂行(불수호난행): 모름지기 어지럽게 가서는 아니된다,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오늘의 내 발자취는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뒤따라 오는 사람에게 본보기가 될것이다

西山大師,禪詩로 白凡 金九 先生님이 愛誦詩로 널리 알려졌고 서예로도 많이 쓰여진 시다.

어른들이 행동을 잘 해야 어린 얘들이 본받아 행동을 잘할 수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어 요즘 세상 어른들이 깊이 세겨야 할 銘禪

서산대사 선시(禪詩) 한 편

踏 雪 野 中 去
(답설야중거)
不 須 湖 亂 行

(불수호란행)
今 日 俄 行 跡

(금일아행적)
燧 作 後 人 程
(수작후인정)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는
행여 발걸음 하나라도 어지럽게 가지 말라
오늘 내가 걸어가는 이 발자취는
반드시 후인들의 길잡이가 되리니'

 눈 내린 들판을 밟아 갈 때는
그 발걸음을 어지러이 하지 말라.
오늘 걷는 나의 발자국은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라.
낮에는 한잔의 차요
밤들면 한바탕의 자비일세.
푸른 산과 흰구름이 함께
나고 감이 없음을 이야기하네.

**서산대사의 선시(禪詩)

결코, 부끄럽지 않은 길을 가겠다.
당초 이 시는 지난 1948년 남북협상 길에 나선 백범 김구 선생이 38선을 넘으면서
인용해 읊었던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그 고결한 정신과 함께 지사와 선비들의 방에 족자의 형태로 걸리기도 했다.
어려운 결단을 내릴  때마다 백범이  되새겼다던
이 시는 사실 서산대사(1520 ~ 160 4)의 「선시(禪詩)」라고 한다.

서산대사 (1520 ~ 1604)

서산대사는(1520~1604. 중종15~선조37)는 법명이 휴정休靜으로 호는 서산 외에 청허당淸虛堂이 유명하다.
사명대사 유정의 스승이며 임진왜란때 73세의 노구로 왕명에 따라 팔도십육종 총도섭이 되어 승병 1,500명을 모집하여 명나라군대와 합세해 서울수복에 공을 세운 그 분이시다.
서산대사는 일선一禪 선사로부터 구족계를 받있는데 일선은 울주군 온양읍 발리 마을 출신이다.
서산대사(西山大師, 1520∼1604)는 호가 청허(淸虛)이며 법명이 휴정(休靜)이고 속성은 최씨이다.
오랫동안 묘향산에 살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서산대사라고 불렀다.
스님은 안주(安州)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었는데 고을 군수의 도움으로 한양에 올라와 공부하였다. 15살 때 진사과(進士科)에 응시했다가 낙방하고 여행길에 올랐는데 지리산에서 숭인장로(崇仁長老)를 만나 머리를 깎았다. 그리고 일선(一禪)화상으로부터 계를 받고 부용 영관(芙蓉靈觀, 1485∼1571)에게서 법을 배웠다. 이후 오대산과 금강산 등의 명산을 구름처럼 떠돌다가 33세 때에 문정왕후와 보우(普雨)선사에 의하여 부활된 승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36세에 판교종사(判敎宗師)와 판선종사(判禪宗師)가 되었고 이어서 선교양종판사라는 최고의 승직에까지 올랐으나 곧 이를 버리고 금강산·두륜산·묘향산 등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에 관련되었다는 무고로 옥에 갇혔으나 결백이 밝혀져 선조의 명으로 석방되었다. 3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군이 패퇴하고 임금마저 의주로 피난하였는데, 73세의 휴정은 선조의 간곡한 부탁으로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이 되어 전국의 모든 승려들이 총궐기하여 싸움에 나설 것을 호소하였다. 이리하여 스님의 문도가 중심이 되어 전국 각지에서 의승군(義僧軍)이 일어나니 그 수가 5000명이나 되었다. 이듬해 의승군은 휴정의 지휘로 명나라 군대와 함게 평양성을 탈환하는데 큰 전공을 세웠으며 왕이 환도한 후에는 늙었다는 핑계로 제자 유정(惟政)과 처영(處英)에게 총섭(摠攝)의 일을 부탁하고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제주집 뒤뜰에 향나무, 마삭줄 20년,,(60세에 ,,)/관리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