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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소학,우이독경, 어조상친,구우일모, 제주 종달리 생가 일부모습.

사자소학 사제) 夙興夜寐(숙흥야매) 勿懶讀書(물나 독서) 글쓴이 함 두빈 시년팔십세

夙興夜寐(숙흥야매)하야 :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서

勿懶讀書(물나독서)하라 : 책 읽기를 게을리 하지 말라.

 

 

 

 

 

 우이독경 牛耳讀經  글쓴이 지환 함두빈 시년팔시세.

우이독경牛耳讀經

요약 둔한 사람 또는 고집이 센 사람에게 아무리 좋은 말을 해 주거나 훈계를 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를 일컫는 속담.

우이독경(牛耳讀經)

"쇠 귀에 경 읽기"라고도 한다. 소는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인간에게 아주 친숙한 동물이었고, 인간의 말을 잘 알아듣는 가축이었다. 그래서 소는 길들이기 쉬운 가축이었지만, 반면에 한번 길들이면 버릇을 쉽게 바꾸지 못했다. 그리고, 행동이 굼떠 미련한 사람을 비유하기도 했다. 미욱한 사람이나 고집이 불통인 사람에게 좋은 말로 아무리 훈계를 해도 잘못 든 버릇을 고치기는 어려움을 소에 경을 읽어주는 것으로 빗대었다. 비슷한 의미로 마이동풍(馬耳東風)이 있다.

                         어조상친 漁鳥相 親  글쓴이 지환 함두빈 시년팔십세

                          물고기와 새는 서로 친하다

 

구우일모 구 九牛一毛  글쓴이 지황 한두빈 시년팔십세

구우일모九牛一毛 , 九牛一毛 , jiǔ niú yì máo

아홉 마리 소에서 터럭 한 개.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일을 비유한 말이다.

출전

한무제(漢武帝) 때 태사령(太史令)이란 직책을 가진 사마천(司馬遷)이란 사관이 있었다. 역시 태사령으로 무제를 모셨던 그의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은 유학의 법통과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중국 고대부터 당시까지의 역사를 기록할 계획을 하고 많은 자료를 수집했다. 하지만 이를 완성하지 못하고 죽게 되자, 아들 사마천에게 사기史記의 완성을 간곡히 부탁하는 유언을 내렸다.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저술에 착수했다. 하지만 그가 역사 집필에 몰두한 지 7년이 경과한 어느 날 청천병력과 같은 재앙을 당하게 된다.

당시 한무제는 자기가 총애하는 이부인(李夫人)의 오빠인 이광리(李廣利)에게 흉노 정벌의 전공을 세우게 해 주기 위해 명장인 이릉(李陵)에게 보급을 맡아 이광리의 뒤를 돕도록 명했다. 그런데 이릉은 무제의 명을 받들지 않고 스스로 별동대 5천 보병을 이끌고 흉노의 땅에 깊숙이 침입하여 흉노의 정병과 독자적으로 싸웠다. 이릉은 흉노 선우의 3만 정병과 맞서 무려 수천 명을 사살했다. 흉노의 선우는 좌우 현왕(賢王)의 정병 8만을 불러들여 도합 11만의 병력으로 이릉을 공격했지만 용감무쌍한 이릉의 군사들을 이길 수가 없었다. 흉노의 선우는 공격을 그치고 철군을 결심했다.

그런데 이릉의 부하 중 하나가 잘못을 저지르고 흉노로 도망하여, 이릉 군대에는 원병도 없고, 화살이 거의 다 떨어졌다는 군사 기밀을 알려 주었다. 이를 안 흉노의 선우는 말머리를 돌려 대대적으로 이릉을 포위하고 맹공을 퍼부었다. 화살과 식량이 다 떨어지고 전사자가 반이 넘었으며, 퇴로를 차단당한 데다가 원군도 오지 않자 이릉은 할 수 없이 항복하고 말았다. 부하들의 대부분은 전사하고 이리저리 도망을 쳐 간신히 한나라로 돌아간 사람은 400여 명에 불과했다. 흉노의 선우는 포로로 잡힌 이릉의 용맹함을 높이 사 자기 딸을 아내로 주는 등 이릉을 후대하였다.

무제는 이로 인해 대로하여 이릉의 노모와 처자를 주살하였으며, 이릉의 죄를 문책하는 어전 회의를 열었는데 어느 누구도 이릉을 비호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사마천은 무제의 화를 잠시나마 누그러뜨려 주기 위해 이릉의 과거의 전공(戰功)과 인품을 들어 그의 투항에 대해 변명하고 나섰다가 그만 무제의 진노를 사, 죄인의 몸이 되어 투옥되고 말았다. 죄목은 ‘무상죄(誣上罪)’, 즉 없는 사실을 꾸며 황제를 모독한 죄로서,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사마천 앞에는 첫째, 사형을 당하는 방법, 둘째, 속전(贖錢) 50만 냥을 물고 풀려나는 방법, 셋째, 부형(腐刑, 남성의 생식기를 제거하는 형벌, 궁형(宮刑)이라고도 함)을 당하는 방법 등 세 가지의 선택이 놓여 있었다. 사마천은 고심 끝에 부형을 선택했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서였다. 사마천이 47세 되던 해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사마천은 더없는 치욕을 당하고 인생의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사마천은 이때의 심정을 〈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는데, 여기에 ‘구우일모’가 나온다.(전문은 ▶ 태산홍모(泰山鴻毛) 참조)

「저의 선친께서는 부부(剖符)나 단서(丹書)를 가질 만한 공로가 없었습니다. 천문 · 태사 · 율력과 같은 일을 담당하였는데 점치는 일과 비슷합니다. 이러한 일은 본래 천자께서 장난삼아 노시던 것으로 광대를 양성하는 것 같아 세상 사람들이 경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제가 형벌에 복종하여 죽음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아홉 마리의 소에서 털 하나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으니 땅강아지나 개미의 죽음과 무엇이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사람들은 저를 절개를 지켜 죽은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지혜가 모자라 죄가 극에 달해 마침내 스스로 죽음에 나가 면할 수 없게 되었다고 여길 것입니다.(僕之先, 非有剖符丹書之功. 文史星歷, 近乎卜祝之閒. 固主上所戲弄, 倡優所畜, 流俗之所輕也. 假令僕伏法受誅, 若九牛亡一毛. 與螻蟻何以異. 而世又不與能死節者, 特以爲智窮罪極, 不能自免卒就死耳.)」

사마천은 그로부터 더욱 발분하고 심혈을 기울여, 큰 뜻을 이루기 위해 치욕을 참고 몸을 굽힌 자신의 삶과 영혼이 투영된 글을 써내려 갔다. 무제 역시 사마천의 충성심과 비범한 재능을 인정하고 그를 중서령(中書令)에 임명했다. 사마천이 55세 되던 해(BC96), 저술에 착수한 지 18년 만에 위로 황제(黃帝)부터 시작하여 당시까지의 역사를 총망라하여 12개의 본기(本紀), 30개의 세가(世家), 10개의 표(表), 8개의 서(書), 70개의 열전(列傳) 등 모두 130편, 52만 6,500자로 기록된 대작인 《태사공서(太史公書)》가 완성되었다. 이 사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역사상 처음으로 인물 중심으로 사건을 기록한 기전체(紀傳體)를 채택했다는 것이다. ‘구우일모’와 비슷한 말로는 ‘창해일속(滄海一粟)’이 있다.(▶ 창해일속(滄海一粟) 참조)

용례

인구가 아주 많은 나라에서 한 사람쯤 죽는 것은 ‘구우일모’에 해당하므로, 흔히들 그런 나라에서는 사람의 목숨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을 것으로 잘못 생각할 수도 있다.

종달리 생가 조개앗골목 105보 거리

함 두빈 생가 입구와마당전경 350평

마당입구에 돌분재 20년생  소나무 ,편백나무 방문객 마중

입구마당에 돌분재소나무아  편백나무

마당입구 소나무2구루(20년생  61세 심은소나무]   편백나무 4구루(큰처남 심은 나무)  뒤편에 단풍남무 두구루

돌담에 20년  씨뿌림 마삭줄이,,

수리대나무 ,홍악줄  경게돌담  새로이사오는 분 겨울초 모종심다

대나무 20년생( 육지에서   제주 종달리로  약15센치 1구루가,,   고구마가 병충해 관리부족으로,,

돌분재 소나무 20년 4구루

아버지가심은  감귤 자연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