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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소학효행편,안근유골,세심,유객/김시습,명심보감, 천사나팔꽃

사자소학 효행 편
사자소학은 우리가 반드시 배워서 지켜야 할 생활규범과 어른을 공경하는 법 등을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가르치는 생활철학의 글이다. 옛 선조들이 서당에서 공부할 때 처음 배우던 것으로 모든 구절이 넉자로 정리된 글로서 한문을 익힘은 물론, 어른과 부... 문화콘텐츠

사자소학효행편)兄友弟恭형우제공 不敢怨怒불감원노 글쓴이 지환 함 두빈시년팔십세

兄友弟恭--- 형우제공  형은우애하고 아우는 공손히 하여

不敢怨怒 -- 불감원노  감히 원망하거나 성내지말아야 한다.

 

안 근 유 골 顔筋柳骨  글쓴이 지환 함두빈 시년 팔십세

서예가들이 좋은 글씨를 가르킬때쓰는 말이다.

중국 당나라의 명필 안진경 의 근육'과

유공권의     뼈  을 뜻함.顔眞卿(안진경; 709~785)

 

  안진경의 생애

  안진경은 709년에 산동성(山東省낭야(琅耶임기(臨沂)에서 서예를 중시하는 전통적인 사대부 집안에서 출생하였다그가 활동한 시기는 당(618~907)289년 기간중 중기에 속하며, 26(734과거에 급제한 후 현종(713~756)대에 중요 관직을 지내기도 하였으며서예의 대가로서 이태백(李太白), 두보(杜甫)와 함께 현종(玄宗)의 뛰어난 신하였다.

 이 시기는 당대사회가 문화적으로 꽃피운 융성기이기도 하지만안록산의 난을 기점으로 쇠락하여 가는 시기이기도 다.

 현종은 말년에(71)양귀비(38)에 빠져 정사를 소홀히 하여 중앙정부가 지방세력을 통제하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고 급기야 지방군벌 안록산은 중원을 침공하기에 이르렀다안록산의 난(755~763)으로 당나라는 8년 동안 전란에 휩싸이게 되었으며현종은 장안을 떠나 피난길에 오르기도 하였다난은 평정되었으나 이후 지방군벌들이 각자 지역에서 통치권을 행사하는 형국이 150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황소의 난을 계기로 당제국은 멸망하게 된다.

 이러한 시기에 안진경은 평원태수(平原太守)가 되었을 때(47안록산의 반란을 만나 의병을 일으켜 싸워 집안에 36명의 전사자를 내면서도 꿋꿋이 의를 세운 사나이중의 사나이였다이후 노군개국공(魯郡開國公)에 봉해져 그를 안노공(顔魯公)이라고도 불렀다북제(北齊)의 학자 안지추(顔之推)의 5대손이다뒤에 중앙에 들어가 형부상서(刑部尙書법무부장관)가 되어 많은 업적을 남겼으나 당시 권신(權臣)의 눈 밖에 나 번번이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785년 덕종(德宗)의 명으로 회서(淮西)의 반장(叛將이희열(李希烈)을 설득하러 갔다가 살해되었다.

 

  안진경의 

  顔眞卿은 처음에 저수량을 배우고 후에 장욱을 배워 해서와 행서에서 고법(古法)을 크게 변화시키는 새 풍격을 이루어 왕희지에 필적할 만한 영향을 후대에 끼쳤다해서의 조형에 있어서 안진경은 전서와 예서의 특징을 흡수하여 그의 해서에 적용시켰다많은 서예가들의 해서가 큰 글씨 쓰기에는 적당치 않았는데 안진경의 해서는 오히려 큰 글씨에 더욱 그 묘한 맛을 발휘한다.

 그의 글씨는 남조(南朝이래 유행해 내려온 왕희지(主羲之)의 전아(典雅)한 서체에 대한 반동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남성적인 박력 속에균제미(均齊美)를 충분히 발휘한 것으로당대(唐代이후의 중국 서도(書道)를 지배하였다·행서·초서의 각 서체에 모두 능하였으며많은 걸작을 남겼다.

 

 顔眞卿의 書藝時期 구분

전기 (50세 까지) : ·당시대에 유행하던 글씨의 영향이 강하던 시기

중기 (51세부터 60세 까지): 강건하면서도 웅후한 기풍과 기세가 당당한 풍격을 이미 형성하고 있는 시기

후기 (61세 이후): 안체의 성숙기

709년 출생 편모슬하 殷氏가문(외가)에서 서학공부남북조 서풍 영향

734(26과거급제

743(35張旭과 만남새로운 서풍을 배움

752(44다보탑비(多寶塔碑)

754(46동방삭화찬비(東方朔畵贊碑)

755(47안록산의 난평원태수로 거병하여 평정에 나섬

758(50제질문고제백문고

763(55안록산의 난 평정

764(56쟁좌위고곽경지 묘비(郭氏家廟碑)

768(60안근례비

771(63마고선단기(麻姑仙壇記)

774(66천록자서(干祿字書)

780(72안씨가묘비(顔氏家廟碑), 자서고신첩(自書告身帖)

785(75사망柳公權(유공권; 778~865)

 

유공권(柳公權 書

유공권(柳公權)은 만당의 서예가로 자는 성현(誠懸)이고 경조화원(京兆華原지금 陝西省 耀縣사람이다송나라 주장문(朱長文)의 속서단(續書斷)의 기록에 의하면목종 때 유공권은 하주(夏州)의 서기(書記)로써 주청을 올렸는데 황제가 이를 보고 짐이 일찍이 불당에서 그대의 작품을 보고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朕嘗于佛廟見卿眞迹思之久矣].” 라고 말하고는 바로 우습유시서학사(右拾遺侍書學士)로 임명했다오래지 않아 조정에서는 또한 그를 우사랑중홍문관학사(右司郞中弘文館學士)로 진급시켰다유공권의 서예는 제왕의 칭찬으로 말미암아 그가 살았을 당시에 이미 귀한 대접을 받았다한번은 문종과 학사들이 시구 잇기를 하는데 문종이, “사람들 모두가 더운 열기에 괴로워하나 나는 여름날이 길어 좋다[人皆苦炎熱我愛夏日長].”라고 하자 많은 사람들이 댓구를 이었지만 문종은 유독 유공권의 훈풍이 남쪽으로부터 불어오니 전각에 서늘함이 일어나네[薰風自南來殿閣生餘涼].”라라고 한 것을 칭찬했다그리고 글의 뜻이 모두 옳으니 전각의 벽에 쓰라고 명했다유공권은 성지를 받들어 붓을 잡고 한 붓에 써냈다글씨의 형체가 매우 커서 약 5촌이 되나 정미함이 아주 뛰어나 문종이 찬탄하며 종요와 왕희지도 이에 더할 수 없도다[鍾王無以尙也].”라고 하며 즉시 그를 소사(少師)로 임명했다또 한 번은 선종의 명에 의해 그는 어전에서 해서로 衛夫人傳筆法于王羲之’, 초서로 謂語助者焉乎哉也’, 행서로 永禪師眞草千字文得家法’ 등 29자를 씀에 영군용사(令軍容使)인 서문계(西門季)가 벼루를 받들고 추밀사(樞密使)인 최거원(崔巨源)에게 붓을 주도록 했다다 쓴 뒤에 매우 칭찬을 하며 기물과 돈을 하사했다이 일이 널리 전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다투어 그에게 배움을 구했다그리고 당시 대신의 가문의 비와 묘지명은 그의 글씨가 아니면 자손을 불효라고 여겼고 외국에서 조공을 바치려고 올 때도 그의 서명이 씌어진 작품을 받아가서 이는 유공권에게 구입한 글씨라고 했다.

 심정즉필정(心正則筆正)’은 당나라 서예가 유공권의 필간(筆諫)과 관련 있는 고사이다당 목종은 어리석고 우둔한 황제로한번은 목종이 유공권에게 글씨를 쓰는 용필법에 대해 물었다유공권은 마음이 바르면 필법도 바르니 가히 법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心正則筆正乃可爲法].”라고 대답하니 당 목종은 얼굴을 바로하고 필간임을 깨달았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유공권의 서예로 해서는 <현비탑비(玄秘塔碑)><신책군비(神策軍碑)>와 행서는 <난정시(蘭亭詩)><몽조첩(蒙詔帖)> 등이 가장 유명하다이들 작품과 관련된 기록을 보면그의 서예는 왕희지를 근간으로 한 후에 또한 수당의 유명 서예가의 작품을 섭렵하여 이를 융회관통하고 변화를 시도하다가 마지막에 스스로 새로운 뜻을 드러내어 뛰어난 대가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송나라의 범중엄(范仲淹)은 뢰석만경문(誄石曼卿文)에서 석만경의 필법은 안진경의 근과 유공권의 골이다[延年之筆顔筋柳骨].”라고 했다이때로부터 안근유골(顔筋柳骨)’이란 미사여구가 생겨 세상에 널리 퍼졌다하지만 후세에 유공권의 글씨에 대한 평가도 다른 서예가들처럼 각자의 견해에 따라 포폄을 달리하고 있다명나라의 동기창은 유공권을 높이 받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공권의 글씨는 힘써 왕희지 필법을 변화시켜 <난정서>의 면목과 같게 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신묘하고 기이하면서 진부한 것을 변화했기 때문에 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무릇 사람이 글씨를 배울 때 자태로 연미함을 취하나 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다나는 우세남저수량안진경구양순의 글씨를 열에 하나 정도 비슷하게 할 수 있다유공권을 배우고부터 비로소 용필의 예스럽고 담담한 곳을 깨달았으니 지금부터는 유공권의 필법을 버리고 왕희지를 따를 수 없다.

   柳尙書極力變右軍法蓋不欲與禊帖面目相似所以神奇化腐朽故離之耳凡人學書以姿態取媚鮮能解此余于虞世南褚顔歐皆曾髣髴十一自學柳誠懸方悟用筆古淡處自今以往不得舍柳法而趨右軍也.

그러나 미불은 해악명언(海岳名言)에서 유공권은 구양순을 본받았으나 심원함에 미치지 못한다그래서 추하고 괴이하게 쓴 못난 글씨의 종주가 되었다[柳公權師歐陽詢不及遠甚而爲醜怪惡扎之祖].”라고 하면서 필법은 여기서 다 사라졌다고 했다이러한 폄하는 전혀 옳지 않고 편파적인 논지임을 면치 못한다.

 

세심  洗心  글쓴이 지환 함두빈 제주 동생 최 형규 에게 시집감

마음을 깨끗이 함 {처염상정}
 ㅇ'장자(莊子)' 한 구절인 '觀水洗心(관수세심) 觀花美心(관화미심)' 
觀水洗心(관수세심) 물을 보면 마음을 씻고
觀花美心(관화미심) 꽃을 보면 마음을 아름답게 하라... /장자 한구절 
찌는듯한 무더위 속에 배다리를 건너오니 한줄금 소나기가 쏟아집니다  
마치 더러운 곳에 처해 있어도 세상에 물들지 않고, 항상 맑은 본성을 간직하고, 맑고 향기로운 꽃으로 피어나 세상을 정화하라는 '처염상정(處染常淨)'을 나타내는 것 같더군요 
녹색의 연밭에 곱게 핀 홍련과 백련을 구경하면서 우리네 인생살이도 깨끗하게 피고 지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ㅇ 처염상정= 연꽃은 [처염상정(處染常淨)]으로 표현되곤 한다.
즉 더러운 곳에 있으면서도 항상 깨끗하다는 뜻이다.
연꽃은 비록 진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그 꽃잎은 티끌하나 묻지 안고 깨끗하므로...
하지만 어디 연꽃 뿐이랴... 
온갖 꽃들도 다 마찬가지이리...

그런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들중에서

선택 받았다는 정치인들은 왜 그리 쓰레기들일까

 

**연꽃  시인/이문조 **
연잎에 맺힌 이슬방울
또르르 또르르
세상 오욕에 물들지 않는
굳은의지 
 썩은 물 먹고서도 어쩜  저리 맑을까
길게뻗은 꽃대궁에 부처님의 환한미소 
혼탁한  세상  어두운 세상 불 밝힐이
자비의 은은한  미소 연꽃 너 밖에 없어라. 

 

    유객 有客/김시습     글쓴이  지환 함 두빈 시년 팔십세

  有客淸平寺 에  春山任意遊 라

  유객청평사      춘산임의유

  鳥啼孤塔靜 이라 花落小溪流 라

  조제고답정        화락소계류

  佳菜知時秀요     香菌過雨柔라

  가채지시수        향균과우유

  行吟入仙洞하여  消我百年憂하노라

  행음입선동        소아백년우.

 

 청평사에 들른 나그네

 춘산에 뜻대로 노니는데

 고요한 탑새가 울고 흐르는

 시냇물엔  꽃이 떨어진다

 아름다운 나물때를 알아돋아나고

 향긋한 버섯 비를맞아 부드럽다

 길가며 읊츠리고 들어서니

 나의 백년 근심 녹일까하노라

   청평사의 아름다운 경치와 나그네의 시름

   청평사는 춘천시 소양땜 상류에.

 

 김시습은 21세부터47 세까지 대부분의 생애를

 방랑으로 보냈다, 그는 세상을 비관하여 수락산,

 설악산,금오산 등지를 유랑하면서 글을 썼는데

 주로 세상의 허무함을 읊었다. 위의 시는

 청평사 계곡의 경치와 자신의 고뇌를 평범한

 시구를 통하여 조화시키고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 자신의 고뇌를 삭이고 있는 작품이다.

ㅇ생육신의 한 사람이며 문인이며 사상가인 기시습의 자연에 몰입되어 행복했던 어느 날의 의식의 편린을 보여주는 시다.

수련 → 어느 봄날 작가는 청평사에 왔다. 물론 나그네 처지로 말이다. 그리고 그즈음 그에게는 아무런 특별한 일도 없는 듯하다. 그는 세상에 얽매임이 없는 처지다. 그는 특별한 생업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 상황이다. 그래서 봄 산(春山)을 마음대로 노닌다고 표현했을 것이다. 계절은 봄이요, 작가가 서 있는 공간은 청평자 주변의 산이다.

함련 → 여기서는 장소의 묘사가 구체화되고, 작가를 자극한 그 장소에서의 사물과 그 사물이 놓여진 정황이 소개된다. 그는 이제 산에서 절로 점차 접근한다.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은 탑이다. 탑 하나만이 서 있다. 사방은 고요하다. 오직 들려오는 소리가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새소리였다. 그 울음은 마음에 어떤 느낌을 줄 만큼 맑고도 깊었을 것이다. 여기서 새의 소리는 탑의 고요함을 더욱 드러낸다. 시간이 조금 더 흘렀을 때, 꽃과 개울이 작가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꽃은 떨어지고 떨어진 꽃은 개울물에 흘러가는 것이다. 끝없이 하염없이 말이다. 작가도 그 흐름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 순간만 그는 자신을 잊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연의 일부가 된 것이다.

경련 → 맛있는 나물도 때를 알고 돋아나고 있다. 여기서 '가채(佳菜)'는 좋은 나물, 맛있는 나물로 해석된다. 그렇다. 그는 나물 맛을 아는 사람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고기만 맛있다고 할지 모른다. 그는 나물의 참 맛을 아는 사람이다. 그는 또 알고 있다. 때를 알고 돋아나는 나물은 맛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 계절의 힘과 향기와 빛깔을 제대로 다고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의 일도 마찬가지다. 하는 일이 때에 맞아야 가장 효과적이지 않은가. 또 작가의 눈에 들어오는 식물이 있으니 버섯이다. 버섯도 계절의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비를 맞아 부드럽다는 것은 검은 버섯이 비에 많이 자라나 있다는 것과 그것이 비를 맞아 윤기와 향기를 더 많이 갖게 되었다는 뜻이다. 봄 산에 내린 비는 생명의 비요, 산을 더 맑고 깨끗하게 정화하는 비라는 느낌을 받는다. 작가는 이 순간 아주 상쾌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주변의 인간잡사는 모두 잊고 있었을 것이다.

미련 → 주위의 풍물에 젖어 부지런히 걸어 시를 읊으며 이제 절로 통하는 길 옆으로 흐르는 개울로 접어든다. 어디선가 쏴 하는 물소리가 들려온다. 이 물소리에 수간적으로 작가는 자신이 보고 있는 봄 경치와는 또 다른 청각적인 맑은 물소리의 울림에 다시 한번 감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평생의 온갖 근심이 다 씻겨 사라지는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 골짜기를 흐르는 물은 사실 골짜기에 모여든 물은 모든 생명들을 키우며 다 구경하고 흘러내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 물은 골짜기 모든 생명의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골짜기의 물소리는 산에 사는 모든 생명의 소리가 한 곳에 합쳐진 소리인 것이다. 갑자기 달라진 자연의 경물에 작가는 몰입되고 만 것이다. 이 순간 천재이기에 당해야 했던 명분에 피해 입고 정치에 상처받은 불우한 김시습의 찢어진 마음, 그 마음을 봉합하기 위한 여러 가지의 사상적인 모색과 방랑생활을 하고 있는 김시습의 분노와 우수가 이 시간 단숨에 치료되고 만 것이다. 김시습이 잠시나마 행복했던 그 먼 날의 어느 봄날이 이 시에 담겨 있는 것이다.
 

 

 

 

 

명심보감/성심편 글쓴이 지환 함두빈

의인막용  疑人幕用 하고  용인물의  用人物疑니라.

의심스러운 사람은 쓰지말고

사람을 쓰거듣 의심하지 말라
ㅇㅇ 대저({대저(大抵) - '대체로 보아서' 라는 이다. 한자어 大抵 큰 대, 거스를 저 / 대체로 보아서. ≒대컨..) 하늘에 명이 있어 영명하신 주상전하께옵서 그 하늘의 명을 받아 본국을 중건하셨으므로
팔도의 뜻있는 유생들이 출사하고 만무부당의 한량들의 전하의 아래 모여들었으니.
이는 모두 주상께옵서 천명을 얻으신 까닭이라 할 것이 옵니다
이에 소생 또한 부족한 몸으로 조정의 대사大事에 그 적은 힘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출사하였으며
밖으로는 나라의 동량이 되어 덕과 예의 상께서 어진정치를 폄에 보필하며.
안으로는 조상께 받은 이름을 빛내어 가문을 영예롭게 하고자 하였나이다.
업무를 맡아 추호도 소홀함이 없도록 노력하였으며.
공평하고 청렴함을 기본으로 삼고 진퇴에 불의와 타협하지 아니하며.
소신을 굽혀 아부하지 않으며 사도를 대하며 물러나지 아니함을 목숨과 같이 여겨왔나이다.
그렇게 조정에 몸담은지 이제 9개월여가 되었고 어느새 소신의 선임자들은 거의 사조를 떠나
호조정랑 양지원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남은 자가 없으니 이제야 소신의 차례인지 알겠나이다.
과거 한나라의 명장, 한신이 적장 종리매의 목을 가지고 유방에게 바치자 유방은 그러한 한신을
포박하였으니 이에 한신이 말하길 "과약인언 교토사양구팽 비조진량궁장 적국파모신망 천하이정 아고당팽
果若人言 狡兎死良狗烹 飛鳥盡良弓藏 敵國破謀臣亡 天下已定 我固當烹" 이라. 교활한 토끼가 죽고 나면
사냥개도 잡혀 삶아지며, 높이 날으는 새도 다 잡히고 나면 좋은 활도 광에 들어가며, 적국이 타파되면
모신도 망한다. 천하가 평정되었으니 나도 마땅히 팽당함이로다. 하였으니.

어찌 이제 소신이 팽당할 차례가 머지 않았다 하리까.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주상전하께옵서 항시 모든 것이 전하의 부덕不德이라 말씀하시었사옵니다만.
과연 주상전하께옵서는 그러한 부덕함을 교정하기 위하여 그간 무엇을 하시었나이까.
수많은 충신들이 죽고 조정을 등질때 그 충언들은 모두 어디로 흩어졌나이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불이불개면 시위과의不而不改 是謂過矣니라 하여 잘못을 저지르고도 고치지
아니함을 일러 잘못이라 한다 하였으며 군자는 정의불량君子는 貞而不諒이라 군자는 굳고 바르나
맹목적으로 고집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전하께옵서는 어찌하여 스스로 고치지 아니하시나이까.
참으로 마이동풍馬耳東風이요 우이독경牛耳讀經일 것이니 과연 이 나라가 뉘의 나라이옵니까.
비록 전하께옵서 만백성의 어버이요. 일국의 군주이나 나라의 주인은 백성인 것이니.
백성의 소리에 귀기울이지 않는다면 어찌 이를 임금이라 하겠으며 만백성의 어버이라 하겠나이까.
주상전하께 그간 수없이 간언하였건데. 부디 정사에 임하시며 간언에 귀기울이시길 바라였으나.
전하께옵서는 그러한 간언을 모두 물리치셨으며.
이제는 이러한 소신의 간언 모두 주상전하를 능멸함이며 욕보임이 되어 버리니.
사조 중건 초기에 언론 귀 기울이시던 전하께옵서는 어디로 가시었고.
독단과 아집에 뭉쳐있는 전하만이 남으셨단 말씀이옵니까.
언로가 열려 있는 것이 중하다 하나 듣는 이가 없다면 열려있지 않음과 다를 것이 없고.
모두가 목숨을 보존하는 것이 중하여 간언하지 아니하고 몸을 사리며 조정에 재출사 하지 않으니
현재의 조정이 과거 은, 주의 후대와 무엇이 다르겠나이까.
명심보감에 이르기를 의인막용하고 용인물의疑人莫用하고 用人勿疑니라.하였으니
사람이 의심되거든 쓰지를 말고 사람을 쓰거든 의심하지 말라 는 뜻이며.
선비는 죽일수는 있어도 욕보일 수는 없는 법士可殺, 不可辱이오니.
주상전하께옵서는 소신의 충정이 의심되신다면 어찌하여 소신을 내치거나 목을 베지 않으시고
이렇게 소신을 욕보이시나이까.
논어에 이르길 태산불사토석 고능성기고泰山不辭土石 高能成其高라 하메 태산은 아무리 작은 돌이나
흙이라도 받아 들임 으로써 저처럼 높게 된 것이다. 큰 인물이 되려면 도량을 넓게 하여 많은 인물을
받아들이는 아량이 필요하다 하는 뜻이니 전하께옵서 만인의 어버이시며 일국의 군주로 마땅히
만백성을 포용할 아량이 필요한 것이 틀림없사온데. 주상전하께옵서는 과연 이러한 바를
충분히 다 하고 계시다고 보시오니까?
천하의 제갈량 역시도 선주의 뜻을 다 이루지 못하여 비통히 오장원에서 생을 달리 하였건데.
부족하고 한참을 미거한 소신이 어찌 영명하신 주상전하께  정도正道를 운운할수 있겠나이까.
한때 조정을 위해 근심한 날들이 바람에 날리는 낙엽과 같으니.
소신은 주상전하께옵서 바람하시는 대로 관직을 사직하고 낙향하여 주변을 정리하고자 하옵니다.
윤허하여 주시리라 믿사옵니다.
이제 주상전하께옵서는 사조의 주인이시며 만백성의 군주이시니 그 행보에 거칠 것이 없으실 것이오며.
앓던 이가 빠진듯 시원하실 것이오니 참으로 경하드리옵니다.

주상전하 천세천세천천세...{ㅇ ■만세삼창의 원조

그러다 철권의 통치자 한무제(기원전 141~87)부터 ‘만세’가 황제의 상징으로 굳어지게 된다.

기원전 109년, 한무제가 숭산(嵩山·허난성 북부의 산)에 올라 제사를 지날 때 사당 옆에서 만세삼창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누가 만세삼창을 했는지 오리무중이었다. 산 위 사람에게 물어도 ‘모른다’고 했고, 산 밑 사람들에게 물어도 ‘듣지 못했다’고 했다. 이를 신비롭게 여긴 무제는 300호의 봉읍을 태실산에 바쳐 제사 지내게 했다.(<사기> ‘효무본기’) 반고의 <한서> ‘무제본기’에도 비슷한 내용이 등장하는데 후한의 학자 순열(148~209)는 “만세삼창 소리는 산신(山神)이 지른 것”이라는 각주를 달았다.

이로부터 15년 후인 기원전 94년 무제는 낭야(산둥성 자오난·山東省 膠南)로 출행해서 산에 올랐다.

“산 정상에 오르자 만세 소리가 들렸다. 바다 위에 더 있는 듯 했는데 어디선가 만세소리가 들렸다. 무제는 그때 ‘신령과 돌 등이 모두 황제를 만세라 부르는데 백관과 백성들은 왜 만세라 하지 않느냐’고 했다. 이때부터 황제에게는 만세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 ‘만세’라 하면 반역이나 불경의 죄로 다스렸다.

후세 사람들은 만세삼창의 원조를 한무제로 여기고 있는 것 같다.

 2

  천사의 나팔꽃 옥상에서//꽃말- 덧없는 사랑

천사의 나팔꽃 특징

천사의 나팔꽃의 원산지는 남미로 높이가 3~6m에 이르는 식물입니다.

천사의 나팔꽃은 잎은 대형종에 속하며 타원형으로 꽃은 긴관 모양으로 큰 꽃을 이루고 있습니다. 꽃은 하얀색, 노란색, 붉은 색등이 있으며 이 식물은 모든 부분에 독성이 있습니다. 특히 씨앗과 잎에는 아토파닌과 스카폴리드 같은 알카로이드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집에 반려동물이나 아기가 있는 집은 주의해서 식물을 관리하셔야 합니다.

천사의 나팔꽃은 아름다운 꽃과 크기가 큰 식물로 정원에서 기르는 식물로 인기가 많으며 꽃이나 잎 및 다른 부분을 섭취하면 위험하기 때문에 각별히 신경을 써 주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