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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소학효행편,격화소양,심은자불우,석고문/오창석,마삭줄바람개비꽃

사자소학 효행 편
사자소학은 우리가 반드시 배워서 지켜야 할 생활규범과 어른을 공경하는 법 등을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가르치는 생활철학의 글이다. 옛 선조들이 서당에서 공부할 때 처음 배우던 것으로 모든 구절이 넉자로 정리된 글로서 한문을 익힘은 물론, 어른과 부... 문화콘텐츠 용어사전

52일 효행편 )不能如此(불능여차)禽獸無異(금수무이) 글쓴이 지환 함 두빈 시년팔십세

不能如此(불능여차)면 : 능히 이와 같이 하지 못하면

禽獸無異(금수무이)니라 : 금수와 다름이 없느니라.

격화소양 [隔靴搔癢]    글쓴이 지환 함두빈  시년팔시세

1) 신을 신고 가려운 발바닥을 긁음

2)애는 쓰되 정곡을 찌르지 못하여 안타까움을 이르는 말,성에차지 아니함,

3) 남의 다리 긁기.

신을 신고 발바닥을 긁는다는 뜻에서, 필요한 것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 성에 차지 않음을 이르는 말.

출전

「방망이를 가지고 달을 치고, 가죽신을 신고서 가려운 곳을 긁는다.(掉棒打月, 隔靴爬癢.)」(《무문관(無門關)》)
「시가 제목에 내포된 뜻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가죽신을 신고 가려운 곳을 긁는 것과 같다.(詩不著題, 如隔靴搔癢.)」(송(宋) 완열(阮閱) 《시화총구(詩話總龜)》)
‘격화소양’은 ‘격화조양(隔靴抓癢)’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다음의 전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먼지떨이로 침상을 두드리니 흡사 가죽신을 신고 가려운 곳을 긁는 것과 같다.(拈拂敲牀, 大似隔靴搔癢.)」(명(明) 거정(居頂) 《속전등록(續傳燈錄) 〈남경영릉안복자승(南京寧陵安福子勝)〉》)
이상의 전적에서 유래하여 ‘격화소양’은 애를 쓰기는 하지만 핵심을 찌르지 못해 답답해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격혜소양(隔鞋搔癢)’ 혹은 ‘격화파양(隔靴爬癢)’이라고도 한다. 《무문관》은 《벽암록(碧巖錄)》, 《종용록(從容錄)》과 함께 선종의 대표적인 책이다.

용례

어차피 시간을 들여 가며 일을 할 바에는 철저하게 해라. 그렇게 ‘격화소양’하듯이 전혀 맞지도 않는 엉뚱한 방법으로 하면 결국 시간과 정력만 낭비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이번에 나온 부동산 정책은 격화소양일 뿐이다
♤격화소양(隔靴搔癢)♤

격♡렬하게 부딪힌 삶의 진실들
화♡끈한듯 보여도 아쉬운 여운
소♡중하게 붙들고 정성 다해서
양♡파껍질 벗겨도 도로 양파네

격화파양 [隔靴爬癢]

신을 신고 발바닥을 긁는다는 뜻에서필요한 것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 성에 차지 않음을 이르는 말

 

 

  심은자불우(尋隱者不遇) / 賈島(가도   글쓴이 지환 함두빈 시년 팔십세

尋隱者不遇(심은자불우 : 은자를 찾았으나 만나지 못했네)

   松下問童子(송하문동자)하니,    소나무 아래에서 동자에게 물으니,

      言師採藥去(언사채약거)  라.    스승은 약을 캐러 갔다고 대답하네.

      只在此山中(지재차산중)이나,    다만 이 산 속에 있으련만,

      雲深不知處(운심부지처)  라.    구름이 깊어서 간 곳을 알길 없구나.

 

  오늘은 깊은 산속의 은자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는 풍경을 읊은 당나라 가도의 시 한 수를 소개합니다.

  찾아간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는 광경을 위의 시에서는 동자와의 대화형식으로 쓰고 있습니다. 구름과 소나무 등이 나타내는 의미는 한폭의 동양화를 보는 것처럼 여유있고, 신비스러움을 자아냅니다.  이런 삶은 궁극적으로 세상과 등진 사람들의 삶의 여유를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현실적인 삶속에서 여유를 찾아본다는 것은 어쩜 오늘날 잡사에 쫒기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은 듯 합니다.  위의 그림은 이불해의 <예장소요도>입니다. 깊은 숲속에서 자연을 벗삼아 소요하고 있는 모습이 오늘의 시와 닮아서 올려 보았습니다.  우리도 이 그림과 시를 음미하면서 여유를 찾아봅시다...

 

  가도(779-843)는 중국 중당(中唐) 때의 시인으로 자는 낭선(浪仙)이고, 지금의 허베이성[河北省]안의 판양[范陽]에서 출생했으며,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고, 중이 되어 무본(無本)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뒤에 韓愈(한유)에게 그 시재를 인정받고 환속하여 변변찮은 벼슬자리에 앉기도 하였습니다. 일찌기 <鳥宿地邊樹, 僧敲月下門>의 句를 얻어, 推자로 할 것인지 敲자로 할 것인가를 결정하지 못해 몹시 애를 먹었다는 일화가 있고, 그래서 지금도 시문을 다듬는 것을 推敲(퇴고)라고 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하루 시를 짓지

 

              먹과붓 ,벼루    /  지환 함두빈    시년 팔십 세

                                              

                                               먹의 세계    ~ 법정스님 잠언집~

               

                                                 단순함이란 그림으로 치면

                                                   수묵화의 경지이다.

                                                     먹으로 그린 수목화

 

                                                이 빛깔 저 빛깔 다 써보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먹으로 하지 않는가,

 

                                                 그 먹은 한 가지 빛이 아니다.

                                                      그 속에는 모든 빛이 다 갖춰져 있다.

 

                                                 또  다른 명상적인 표현으로 말하면

                                                    그것은 침묵의 세계이다.

                                                      텅 빈 공의 세계이다

 

                                 

                               석고문  / 오창석      글쓴이 지환 함 두빈 시년 팔십세

석고문 오창석 팔십삼세
아거기공 --나의 마차는 이미 공교하고
아마기동-- 나의 말은 이미 가지런히 준비되어 있고
아거기호 --나의 마차은 이미 훌륭하고
아마기부 --나의 말들은 이미 살찌고 튼튼하다

       

청말 민국초에 예원을 주도하며 중국 최후의 문인으로 일컬어지는 인물로 오창석이 있다. 오창석(1844~1927)은 초명이 준(俊), 후에 준경(俊卿)이라 하였으며, 자는 향보(香補), 창석(倉碩), 창석(蒼石)이라 하였는데 민국 원년 이후의 작품에는 거의 창석(昌碩)으로 사용하였다. 호는 부려(缶廬)를 비롯하여 고철(苦鐵), 대농(大聾), 파하정장(破청말 민국초에 예원을 주도하며 중국 최후의 문인으로 일컬어지는 인물로 오창석이 있다. 오창석(1844~1927)은 초명이 준(俊), 후에 준경(俊卿)이라 하였으며, 자는 향보(香補), 창석(倉碩), 창석(蒼石)이라 하였는데 민국 원년 이후의 작품에는 거의 창석(昌碩)으로 사용하였다. 호는 부려(缶廬)를 비롯하여 고철(苦鐵), 대농(大聾), 파하정장(破荷亭長)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절강성 효풍현(孝豊縣)에서 출생하였는데 이곳이 옛날 안길현(安吉縣)에 소속되어 있었으므로 관지에 간간이 '安吉'이라 쓰곤 하였다.

학서이력을 살펴보면, 29세 때부터 친구 김걸(金傑)과 항주, 소주, 상해를 유력하며 견문을 넓혔다. 항주에서 유월에게 문장과 문자훈고를 배우고, 소주에서 양견산(楊見山)에게 서법과 시문을 배웠는데 특히 양견산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또 금석수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반조음(潘祖蔭), 오운(吳雲), 오대징과 가까이 지내며 고문물과 고탁본을 직접 접하였고, 그에 대한 경험은 자연스럽게 서법과 전각으로 이양되었다. 1904년에 항주 서호(西湖) 가에 인장가들의 모임인 서령인사를 설립, 초대이사장으로 추대되면서부터 예원을 주도하였다. 시집으로 「부려집」, 인보로 「삭고려인존」 「부려인존」, 서화집으로 「고철쇄금(苦鐵碎金)」 등이 전한다.

흔히 오창석의 예술을 종합하여 "전각이 제일이며, 서가 다음이고, 그림이 그 다음이다."라고 일컫는데 실제로 시서화각 사절로서 손색이 없다. 특히 전각의 근간이 되는 전서를 깊이 탐구하여 독자적 서풍을 확립하였으며, 이는 다시 전각과 문인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전각을 제일로 손꼽지만 사실 그것은 전서의 연구에서 발양된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느 분야나 서를 근간으로 삼아야만 전각과 그림에 품격이 생긴다는 점이다. 이는 서의 격에 따라 전각과 그림의 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오창석이 어려서부터 부친을 통해 인장을 접하였지만 유독 전서를 연구하며 필력을 연마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그가 전각가로서 또는 서화가로서 평생 임모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석고문(石鼓文)이다. 오창석이 임서한 석고문은 여러 본이 있다. 참고로 일본의 이현사에서 중국법서선60으로 영인한 전4폭의 림본은 75세 때에 서원사(西園寺) 공망(公望)의 부탁을 받아 쓴 것이다. 여기에 소개하는 임본은 관기에도 보이듯, 최말년기에 해당하는 82세 때(乙丑, 1925년)의 작품으로 오창석은 "을축년 한가을에 간 질환을 앓고 있던 초기에 썼으나 굳센 기운이 있다."라고 자평하였다. 오창석의 임석고문은 오늘날 문자학적 입장에서 보면 다소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필법과 결구를 터득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마종곽은 오창석이 쓴 석고문을 보고 '매화를 그리는 법으로 썼다'고 평하였는데 그만큼 금석미가 풍부함을 지적한 말이다. 이외에 창작품으로 서령인사기를 비롯하여 수진택허당기(修震澤許塘記)가 널리 알려져 있으며, 록소융시삼장(錄小戎詩三章)이 뛰어나다. 오창석의 많은 작품들을 수습해보면 법고를 통한 창신이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어떻게 자기세계를 구축해야 하는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답글荷亭長)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절강성 효풍현(孝豊縣)에서 출생하였는데 이곳이 옛날 안길현(安吉縣)에 소속되어 있었으므로 관지에 간간이 '安吉'이라 쓰곤 하였다.


학서이력을 살펴보면, 29세 때부터 친구 김걸(金傑)과 항주, 소주, 상해를 유력하며 견문을 넓혔다. 항주에서 유월에게 문장과 문자훈고를 배우고, 소주에서 양견산(楊見山)에게 서법과 시문을 배웠는데 특히 양견산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또 금석수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반조음(潘祖蔭), 오운(吳雲), 오대징과 가까이 지내며 고문물과 고탁본을 직접 접하였고, 그에 대한 경험은 자연스럽게 서법과 전각으로 이양되었다. 1904년에 항주 서호(西湖) 가에 인장가들의 모임인 서령인사를 설립, 초대이사장으로 추대되면서부터 예원을 주도하였다. 시집으로 「부려집」, 인보로 「삭고려인존」 「부려인존」, 서화집으로 「고철쇄금(苦鐵碎金)」 등이 전한다.

흔히 오창석의 예술을 종합하여 "전각이 제일이며, 서가 다음이고, 그림이 그 다음이다."라고 일컫는데 실제로 시서화각 사절로서 손색이 없다. 특히 전각의 근간이 되는 전서를 깊이 탐구하여 독자적 서풍을 확립하였으며, 이는 다시 전각과 문인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전각을 제일로 손꼽지만 사실 그것은 전서의 연구에서 발양된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느 분야나 서를 근간으로 삼아야만 전각과 그림에 품격이 생긴다는 점이다. 이는 서의 격에 따라 전각과 그림의 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오창석이 어려서부터 부친을 통해 인장을 접하였지만 유독 전서를 연구하며 필력을 연마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그가 전각가로서 또는 서화가로서 평생 임모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석고문(石鼓文)이다. 오창석이 임서한 석고문은 여러 본이 있다. 참고로 일본의 이현사에서 중국법서선60으로 영인한 전4폭의 임본은 75세 때에 서원사(西園寺) 공망(公望)의 부탁을 받아 쓴 것이다. 여기에 소개하는 임본은 관기에도 보이듯, 최말년기에 해당하는 82세 때(乙丑, 1925년)의 작품으로 오창석은 "을축년 한가을에 간 질환을 앓고 있던 초기에 썼으나 굳센 기운이 있다."라고 자평하였다. 오창석의 임석고문은 오늘날 문자학적 입장에서 보면 다소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필법과 결구를 터득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마종곽은 오창석이 쓴 석고문을 보고 '매화를 그리는 법으로 썼다'고 평하였는데 그만큼 금석미가 풍부함을 지적한 말이다. 이외에 창작품으로 서령인사기를 비롯하여 수진택허당기(修震澤許塘記)가 널리 알려져 있으며, 록소융시삼장(錄小戎詩三章)이 뛰어나다. 오창석의 많은 작품들을 수습해보면 법고를 통한 창신이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어떻게 자기세계를 구축해야 하는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옥상에 마삭줄 바람개비꽃   23-5- 19 일

현애대형작품  4단(화분4개이음)  마삭줄 바람개비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