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사자소학효행편,고복격양,북정가/남이장군,가훈, 거미줄바위솔

사자소학 효행 편

사자소학은 우리가 반드시 배워서 지켜야 할 생활규범과 어른을 공경하는 법 등을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가르치는 생활철학의 글이다. 옛 선조들이 서당에서 공부할 때 처음 배우던 것으로 모든 구절이 넉자로 정리된 글로서 한문을 익힘은 물론, 어른과 부... 문화콘텐츠 용어사전

43일 효행편)사필품행 事必稟行 무감자전 敢無自專  글쓴이 지환 함 두빈 시년팔십세

사필품행 事必稟行  일은 반드시 여쭈어 행하고

무감자전 敢無自專  감히 자기 멋대로 하지 말라

 

 

      고복격양(鼓腹擊壤  )글쓴이 지환 함두빈 시년팔십세   

        고복격양(鼓腹擊壤)배를 두드리고 발을 구르며 흥겨워한다는 뜻으로, 백성들이 태평세월을 누린다는 말.

유가(儒家)에서는 성군(聖君)의 표상(表象)으로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을 꼽는다. 두 임금의 치세는 아직 고증이 되지 않아 신화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으나, ‘공자나 맹자 같은 성인이 가상이나 전설의 인물을 그토록 받들고 거론했겠느냐’는 반론이 많다.

《18사략(十八史略)》 〈제요편(帝堯篇)〉과 《사기(史記)》〈오제본기편(五帝本紀篇)〉에, 천하의 성군으로 꼽히는 요임금이 천하를 통치한 지 50년이 지난 어느 날, 자신의 통치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 평복으로거리에 나섰다.

그가 어느 네거리를 지날 다. 어린 아이들이 서로 손을 잡고이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입아증민(立我烝民)
막비이극(莫匪爾極)
불식부지(不識不知)
순제지측(順帝之則)
우리가 이처럼 잘 살아가는 것은
모두가 임금님의 지극한 덕이네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임금님이 정하신 대로 살아가네
강구연월 康衢煙月
태평한 시대의 평화로운 풍경
비옥가봉 比屋可封
나라에 어진사람이 많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함포고복 含哺鼓腹많이먹어서 배를 두드리며 즐김(집집마다 표창할만 한 인물이 많다)

 

北征歌북정가 /충무공  남이장군 ,  글쓴이 지환 함 두빈 시년팔십세

白頭山石 磨刀盡백두산석마도진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豆滿江水 飮馬無두만강수 음마무

두만강의 물은 말을 먹여 없애고

南兒二十 未平國남아이십미평국

남아 이십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後世誰稱 大丈夫 후세수칭대장부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칭하리오

유명한 詩 다. 누구나 한번쯤은 접해 본 詩일것이다.

남이 장군(1441~1468)이 이시애의 난(1467년)을 평정하고 백두산에 올라 지은 시다.

대장부의 기개가 철철 넘친다.

특히, 二十에 未平國이라니 엄청난 포부다.

그러나 이 詩(여기서 平字를 得字로 바꾸어 나라를 찬탈하려 한다는 음모론이 제기 되었다.)로 인해 남이장군은 역적으로 몰려 유자광의 일당에게 28세의 나이에 안타까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만약 非命橫死 하지 않았다면 조선의 역사가 달라졌을까???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이 없었을까???

억울한 죽임에 눈은 어떻게 감았을까?

嗚呼라 !!!남이 장군은 조선 세조대의 인물로 약관의 나이도 되기 전에 무과에 급제했던 기린아였다. 평소 강직하고 굽힐 줄 모르는 성품을 지녔던 그는 함경도에서 이시애의 난이 일어났을 때 뛰어난 무공을 발휘하여 출셋길에 올랐다. 이어서 파저강 일대의 건주위 여진족 정벌에 참여하여 추장 이만주 부자를 사살함으로써 일약 조선의 영웅으로 부각되었다.

세조 말년에 남이는 임금의 총애를 받아 구성군 이준의 뒤를 이어 28세의 젊은 나이에 병조 판서가 되었다. 하지만 신진세력의 약진을 고까워하던 한명회와 신숙주 등 훈구대신들의 견제를 받았다.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이 등극하자마자 남이는 병조 판서에서 겸사복장으로 좌천되는 수난을 당한다.

그로부터 불과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남이는 역모를 꾀했다는 유자광의 고변으로 체포되어 능지처참 당하고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했다. 한명회의 친구였던 장인 권남은 몇 년 전 세상을 떠났으므로 수렁에 빠진 그의 방패막이가 되어주지 못했다.

백성들은 남이 장군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채 피기도 전에 꺾여버린 그의 운명을 아기장수 설화에 대입시키기도 했다. 무속에서는 억울하게 죽은 그의 원혼이 크나큰 위력을 발휘한다고 생각하여 신령으로 받들기까지 했다. 그는 조선시대에 있었던 9명의 충무공 중에 한 명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충무공 12 분***

우리나라에는 충무공이 몇분이나 있을까요? 고려시대에 3분이 계시고 조선시대에 9분~!!! 모두** 12분이나 계십니다.** 어? 충무공은 이순신장군 아니야? 하시는 분이 대부분이실거라 생각하는데요 물론 이순신장군님도 충무공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다른분들을 너무 모르고 있다는 거지요.

아 먼저 '충무공'이란 시호부터 설명해야 겠습니다. 공이 많은 신하가 죽으면 임금이 그 업적을 기려 시호를 내리는데요 **무인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시호가 충무공입니다.** 문인은 문충공, 충문공, 문성공이 이에 해당합니다.

**고려시대에는 3분의 충무공이 있었습니다. **지용수, 박병묵, 최필달. **혹시 아시는분 있으신가요? 우리나라 역사교육의 문제입니다 너무 고려시대에 대해선 안가르칩니다. 관심도 없는 듯 하구요.

지용수장군은 고려 공민왕때 활약하신 장군으로 홍건적의 침입때 빼앗긴 고려의 수도 개경을 다시 찾는데 큰 공을 세웠고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원나라가 침입했을때도 이를 막아내었습니다. 또한 1370년 공민왕의 명에의해 요동을 정벌하고 돌아옵니다. 이때가 우리나라가 고구려와 발해 이 후 요동을 차지했던 마지막입니다 ㅜ.ㅜ 지용수 장군은 언제 태어나어 언제 돌아가셨는지 기록이 없습니다. 다른 충무공이신 박병욱은 나주박시의 시조이며 고려 평장사를 지내셨다는데 역시 기록이 없고, 최필달은 강릉최씨의 시조이고 고려 때에 삼중대광으로 삼한벽상 개국찬화공신에 책록되어 영첨의좌정승을 역임한 후 경흥군에 봉해졌다 하는데 더이상의 자료를 찾지 못했습니다. 혹시 나주박씨나 강릉최씨 족보에 이분들에 관하여 더 상세하게 기록이 되어있지 않을까요??

**조선시대에는 **9분의 충무공이 있었는데 **첫번째는 앞서 말씀드린 조영무입니다. 고려말에서 조선초의 무신으로 이성계를 도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하는데 일조하고 선죽교 정몽주를 죽인 사람이 바로 이분입니다. 이후 1차왕자의 난과 2차 왕자의난에서 이방원을 도와 공을 세웁니다. 조영무장군의 묘는 경기도 광주에 있습니다. 경기도 광주 퇴촌면이란 지명을 들어보셨나요? 조영무장군의 호가 바로 퇴촌입니다. 장군의 무덤이 바로 이 퇴촌면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 지역 지명이 퇴촌면이 된 것이지요. 그런데 가보면 이정표도 하나 제대로 되어있질 않아 아쉽습니다.

**2번째 충무공은 세종의 4째아들인 임영대군의 아들, 이준입니다. 25세의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이시애의 난을 남이, 강순과 함께 진압한 공로로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1468년 영의정 되었는데 이 때 그의 나이는 27세로 조선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에 정승이 된 사람입니다. 뭐 집안이 빵빵하니~~ 쩝~~ 1470년(성종 1) 나이 어린 성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려 한다는 정인지 등의 탄핵을 받아 삭탈관직을 당하고 경상도 영해로 귀양보내져 10년 만에 죽었죽었습니다.

**3번째 충무공은 남이장군입니다. 남이 장군은 아는분이 많으시죠? 남이장군 역시 어마어마하게 빵빵한 가문의 남아로 태어납니다. 태종의 딸인 정선공주가 할머니입니다. 조선 개국공신 남재의 5대손이구요. 이시애의 난과 건주여진 정벌 등에서 공을 세워 세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27세의 나이에 공조판서가 됩니다. 그러나 세조가 죽자 억울한 모함을 받아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에 처해집니다. 남이장군의 묘는 2군데가 있는데 알고 계시나요? 바로 춘천 남이섬에 가면 남이장군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섬 이름이 남이섬입니다. 알고 계셨나요? 그런데 이건 가묘인 것으로 보이고 실제 남이장군묘는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에 있습니다. 남이섬에 가실일이 있으시면 남이 장군묘에도 꼭 한번 들러보세요. 남이장군묘와 옆에 남이장군을 역모죄로 죽게 만든 문제의 시가 새겨진 비가 있습니다. 그런데 참 특이한 것이 이 남이장군의 옥사를 다스린것이 위에서 말한 2번째 충무공 이준입니다. 거 참~

 

 남이섬에 있는 남이장군묘와 시비

**4번째 충무공은 우리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충무공~~!!!! 바로 이순신장군입니다. 워낙 많이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분이고 모르는 분이 거의 없으시기 때문에 넘어가겠습니다

**5번째 충무공은 임진왜란당시 진주대첩의 영웅 김시민장군입니다. 1592년 10월 일본군은 진주를 통해 전라도로 진공할 목적으로 3만의 대군으로 진주성을 공략했는데, 김시민은 3,800여 명의 병사로 맞섰습니다. 10월 5일부터 11일까지 치열한 혈전이 벌어졌고, 성 안의 백성들까지 합세하여 수적으로 많았던 일본군의 공세를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김시민은 전투 마지막 날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는 도중에 일본군의 탄환을 맞아 38세로 전사하셨습니다. 임진왜란 3대 대첩중 한산대첩의 이순신장군님과 더불어, 진주대첩의 이 김시민장군께서 충무공입니다. 행주대첩의 권율장군은 충무공이 아닙니다. 충장공이지요 ^^; 혹시 진주성에 가보셨나요? 진주성에 가보시면 김시민 장군의 동상이 있고 2차 진주성 전투 패배 후 적장을 안고 남강으로 장렬하게 뛰어든 논개의 사당도 있습니다. 아래 사진을 보시면 김시민 장군 동상에 충무공이라고 한문으로 씌여있지요? ^^

 

 

 

 

진주성에 있는 김시민장군 동상(좌)과 논개사당(우)

**6번째 충무공은 이수일 장군입니다. 1583년 무과에 급제하였고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우셨습니다. 1602년 남도병마절도사가 되어 여진족을 소탕하였고,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에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부원수를 겸해 길마재[鞍峴]에서 반란군을 무찔러 서울을 수복한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2등에 책록됩니다.

**7번째 충무공은 정충신 장군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 권율)의 밑에서 종군하였습니다. 이 때 권율이 장계를 행재소에 전달할 사람을 모집했으나 응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17세의 어린 그가 가기를 자청하고는 왜군으로 가득한 길을 단신으로 뚫고 행재소에 도착하였다고 합니다. 이괄의 난때는 이괄의 군사를 황주와 서울 안산에서 무찔러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에 책록됩니다.

**8번째 충무공은 인조의 외사촌이었던 구인후입니다. 인조반정에 참여하였고 정묘호란때는 인조가 피란은 간 강화도에서 주사대장이 되었고 병자호란때는 병사 3000명를 데리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국왕을 호위했다고 합니다. 1644년에는 심기원(沈器遠)의 모역 사건을 적발, 처리한 공으로 영국공신(寧國功臣) 1등에 책록됩니다.

**마지막 9번째 충무공은 김응하입니다. 1618년 광해군때 명나라가 후금을 칠 때 조선에 원병을 청해오자 이듬해 2월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 후금정벌에 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명나라 군사가 대패하자, 3,000명의 휘하군사로 수만 명의 후금군을 맞아 고군분투하다가 중과부적으로 패배하고 전사하였습니다. 이듬해 명나라 신종이 용전분투하다가 장렬한 죽음을 당한 데 대한 보답으로 특별히 조서를 내려 요동백(遼東伯)에 봉하고, 처자에게는 백금을 하사하였다고 하며, 광해군도 전사를 가상히 여겨 영의정을 추증하였습니다.

이상 우리나라의 충무공들을 살펴봤습니다. 생각보다 많지요? 몇분의 충무공을 알고 계셨나요? 우리나라의 역사교육의 한계이자 문제점이라고 봅니다. 좀 더 우리나라의 역사에 관해서 중등, 고등과정에서 가르쳤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아 그리고 여담으로 중국에도 충무공이 있습니다. 음 황제국가라 충무공이 아니라 한등급 더 위로, 제후 후자(侯)를 써서 충무후 로 쓰는 경우도 있구요. 우리가 잘 아는 삼국지의 인물 제갈공명~ 그의 시호가 충무후입니다. 그냥 무후라고 부르기도 하구요. 그 외에도 송나라때의 장군 악비도 있는데 중국역사는 빼도록 하겠습니다 ^^.

[출처] 우라나라의 충무공|작성자 해미르

 

쌍둥이 아빠의 치과 이야기(서울힐치과의원) : 네이버 블로그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졸업 서울대학교 치과병원 구강악안면외과 인턴, 레지던트 수료 치과 전문의(구강악안면외과)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원 치의학 석사(구강악안면외과학 전공) 해군 군의관으

blog.naver.com

유지경성 有志竟成/ 가훈쓰기 글쓴이 지환 함 두빈 시년팔십세

뜻이 있으면 마침내 이루어진다의지를 가지고 있으면 마침내 이룬다. 뜻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성공한다는 말이다

  1. 출전
  2. 한(漢)나라 때 부풍(扶風) 무릉(武陵, 섬서 흥평(興平)) 사람 경엄(耿弇)은 어렸을 때부터 배우기를 좋아했는데, 고을에서 말을 타고 깃발과 북을 세우고 활 쏘는 것을 훈련하는 것을 자주 봐 무예를 좋아하게 되었다. 전한(前漢) 말, 왕망(王莽)이 한의 황위를 찬탈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 신(新)을 세운 후, 과도한 개혁 정책의 실패로 사회가 혼란에 빠져 들자 도처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한 왕조의 핏줄인 유연(劉縯)과 유수(劉秀) 형제들도 한 왕조의 부흥을 내걸고 군사를 일으켰다.(▶ 부족회선(不足回旋) 참조) 이들은 각지에서 왕망의 군대와 도적 떼들을 격파하고 경제(景帝)의 자손인 유현(劉玄, 경시제(更始帝))을 옹립함으로써 한 왕실을 재건했다. 경엄은 유수의 휘하로 들어가 많은 공을 세웠으며, 유수가 동한(東漢)을 세우고 광무제(光武帝)로 즉위하는 데 크게 일조했다.(▶ 오합지졸(烏合之卒) 참조)
  3.  
  4. 당시 천하는 아직 완전히 평정되지 않은 상태였는데, 광무제 건무(建武) 3년(27), 경엄은 광무제를 따라 남양(南陽)에 도착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웅대한 계획을 광무제에게 건의했다. 먼저 북상해서 상곡(上谷)의 병력을 모은 다음, 어양(漁陽)의 팽총(彭寵)을 멸하고, 다음으로 탁군(涿郡)의 장풍(張豊)을 멸하고, 군사를 돌려 부평(富平)과 획색(獲索)의 농민군을 진압한 다음, 동쪽으로 장보(張步)를 공격하여 제(齊)나라 땅을 평정하는 것이었는데, 이를 경엄의 ‘남양전략(南陽戰略)’이라 한다. 광무제는 경엄의 건의가 타당하다고 생각하고 건의를 받아들였지만,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건무 4년(28), 경엄은 자신의 계획대로 먼저 주변의 무장 세력들을 진압하여 승리를 거두었는데, 그 사이에 경엄의 아버지 경황(耿況)과 동생 경서(耿舒)가 어양의 팽총 세력을 평정했다. 건무 5년(29), 경엄은 부평과 획색의 농민군을 진압했다. 건무 5년(29)의 10월, 유수는 경엄에게 장보를 칠 것을 명했다. 장보는 역하(歷下, 산동 제남시(濟南市) 역성구(歷城區) 서남)와 축아(祝阿, 산동 제남시 장청구(長淸區) 동북)에 병력을 배치하고 대항했다. 경엄은 황하를 건너 먼저 역하를 공략한 후, 축아까지 공략하고 임치(臨淄)로 진격했다. 하지만 경엄은 장보의 주력 부대를 만나 많은 사상자를 내는 등 큰 타격을 입고, 자신도 다리에 화살을 맞는 중상을 입었다. 그때 마침 유수가 구원병을 이끌고 달려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경엄은 “황제께서 납시는데 소를 잡고 술을 준비하여 융숭하게 환영해야지, 어찌 이런 적들을 황제께 남겨 둘 수가 있겠느냐?”고 말하며 군사들을 독려하여 장보를 공격해 결국 임치를 함락시

「그 후 며칠이 지나서 광무제가 임치에 도착하여 군사들을 위로하는데, 군신이 다 모였다. 광무제가 경엄에게 말했다. “옛날 한신(韓信)이 역하를 공략해 나라의 터전을 열었는데, 오늘 장군은 축아를 공략해 나라를 흥기하게 했구려. 이곳들은 모두 제나라의 서쪽 경계로, 그 공은 서로 필적한다고 볼 수 있소. 하지만 한신은 이미 항복한 나라를 습격했고, 장군은 강적을 멸했으니 한신보다 더 어려운 공을 세운 것이오. ······ 장군이 전에 남양에서 이 큰 계책을 건의했었는데, 실현되기 어렵다고 항상 생각했었소. 그런데 뜻을 가진 사람이 결국 일을 성공시키는구려.”(後數日, 車駕至臨淄自勞軍, 群臣大會. 帝謂弇曰, 昔韓信破歷下以開基, 今將軍攻祝阿以發迹, 此皆齊之西界, 功足相方. 而韓信襲擊已降, 將軍獨拔勁敵, 其功乃難於信也. ······ 將軍前在南陽建此大策, 常以爲落落難合, 有志者事竟成也.)」
이 이야기는 《후한서(後漢書) 〈경엄전(耿弇傳)〉》에 나오는데, 광무제가 경엄을 칭찬한 말인 ‘유지자사경성야(有志者事竟成也)’에서 ‘유지경성’이 유래했다.
‘한신이 이미 항복한 나라를 습격했다.’는 말은 다음과 같은 역사적 사실을 가리킨다.
초한 전쟁 당시 유방이 한신에게 제나라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역이기(酈食其)가 제나라 왕 전광(田廣)을 설득하겠다고 하자 유방은 역이기를 제나라에 보냈다. 제나라 왕은 역이기의 설득에 넘어가 한나라에 항복하기로 하고, 군사를 거두고 역이기를 잘 접대했다. 한편, 한신은 유방의 명을 받아 군사를 이끌고 제나라를 치러 가는 사이 역이기가 세 치 혀로 제나라를 항복시켰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나라 정벌을 중지할 생각을 했다. 이때 변사인 괴통(蒯通)이 한신에게 제나라를 치도록 설득했다. 비록 한왕이 밀사 역이기를 보내 제나라의 항복을 받아 내긴 했지만, 한신에게 제나라 공격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는 것과, 한낱 유생에게 공(功)을 넘길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한신은 괴통의 말을 따라 제나라를 습격하여 수도 임치까지 육박해 들어갔다. 제왕 전광은 역이기가 자기를 속였다고 생각하고 역이기를 삶아 죽여 버리고 고밀(高密)로 달아나, 초나라 항우에게 사신을 보내 구원병을 요청했다.(이후의 이야기는 ▶ 해의추식(解衣推食) 참조) 이 이야기는 《사기(史記) 〈역생육가열전(酈生陸賈列傳)〉》에 나온다.

용례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시작도 하기 전에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패배주의적인 생각을 하지 말고, ‘유지경성’이라는 확신을 가져라.

거미줄바위솔